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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선시대 과거시험 수준이 높군요
글쓴이 건곤대나이 작성시각 2015/10/09 1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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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험문제]

왕[세종대왕]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예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

그대 대부들은 사책(史策)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


성삼문의 답안
1447 년 세종 29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대책[답] : 

신이 들으니, 마음은 정치를 하는 근본이고, 법은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라 합니다.

만 가지 변화가 마음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고, 여러 정치가 마음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된 자가 마음을 보존하고 법을 들어 정치를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날 현명한 임금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이와 같이 했을 뿐이었습니다.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성군(聖君)으로서 훌륭하신 선대의 임금을 계승하여 온 정성을 다해 다스리길 도모하시니 정치를 하는 근본이 이미 섰고, 정치를 하는 데 필요한 도구도 잘 시행되어 시사(時事)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한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구제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시어 과장(科場)에 신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병을 설치하는 것, 대신을 예로 대하는 것, 정권을 나누는 것, 정방을 다시 세우는 것 이 네 가지를 질문의 조목으로 삼아 먼저 역대 정치의 득실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대신이 건의한 것의 가부를 물으시어 지당하게 하나로 귀결되는 의논을 듣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이니 감히 비천한 회포를 다하여 고결한 물음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를 줄이고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二帝; 요임금과 순임금], 삼왕[三王;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 문왕과 무왕은 부자(父子)이므로 한 임금으로 친다]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법이 오래 되고 나서야 폐단이 생겼고 폐단이 생겨도 구제하기에 쉬웠습니다.

소위 '황제(黃帝), 요임금, 순임금이 일어나 그 변화에 통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며, 신령스럽게 교화시켜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하게 하였다[주역 계사편]'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후대의 임금은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법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니, 법에 한번 폐단이 생기면 다시 구제할 수 없어, 마침내 혼란하고 망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고조(BC 206 - 195)는 군국에 재관과 기사를 두고, 장안에는 다만 남북군의 숫자만 있고, 일이 있으면 새의 깃을 꽂은 격문으로써 군대를 소집하였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혁파하였습니다.

무제(BC 142 - 87) 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북군의 군사를 군국에게 번상(番上; 지방의 군사를 골라 뽑아 서울의 군영으로 보내는 일)하게 하였지만 장안에는 일정하게 머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왕망(8 - 23)이 찬탈했을 때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도 위병이 이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적의[왕망을 토벌한 사람]는 전차와 기병(騎兵)으로서 군대를 일으키고, 또한 광무제도 이통의 계책을 써서 무사 선발 시험 날을 이용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마침내 한나라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에 군국[지방]의 도위[군 지휘관]를 줄이고 거기[병거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였습니다.
그 뒤로 힘센 신하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외방에 의탁할 만한 번진 세력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동탁이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향하고, 원소와 조조가 각각 한 지역에 웅거하여 마치 자기 소유처럼 하였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외방 병력이 강하고 중앙 병력이 약해서 일어난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당나라 부병제[지방의 농민을 농한기에 훈련시켜 군사로 한 것]가 세 번 변하여 번진이 되었는데, 번진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반란을 일으키는 장수와 힘센 신하가 천하에 늘어섰고, 조정의 정령이 미치는 곳이 한 곳도 없게 되어 결국 당나라는 망하였습니다.

오대 말엽의 그 군신(君臣)들은 모두 번진에서 일어났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내서 그 사실을 직접 보았으므로 나라를 세운 초기에 왕심기, 석수신 등의 병권을 혁파하고, 조용히 술잔을 권하는 사이에 번진의 수백 년 폐단을 없애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통제하였으니 잘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쇠약해져 도적이 사방에서 쳐들어왔고, 적들의 기세가 임금이 사는 수도의 코앞에 이를 때까지 무인지경을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외방에 충성을 다하여 구원하는 병사가 없어, 마침내 두 황제가 북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후 자손이 겨우 양자강 왼쪽을 보존하고 끝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대신은 임금의 보좌이니, 대신이 존귀한 후에 임금의 세력도 높은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어찌 일반 서민들에게 하는 것처럼 경(얼굴에 문신을 하는 벌), 의(코를 베는 형벌)와 같은 치욕스런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한 문제는 가의가 조정에서 한 말을 받아들여 대부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정선과가 죄수 속에 섞여 나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삼품(三品)이상의 대신은 일반 죄수와 더불어 함께 불러들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신을 예로서 대하는 아름다운 뜻이나, 그 말류의 폐단으로 주아부, 소망지, 유계, 장량(張亮; 당태종 때 사람, 한고조의 신하가 아님) 등이 원망을 품고 죽어 갔습니다.
어느 때는 대신으로 하여금 아무 하소연도 못하게 하고, 어느 때는 귀한 신하로 하여금 불려와 정황을 설명하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그 잃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하루라도 남에게 빌려 줄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 말에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여 태아(太阿; 중국 고대의 보검)를 거꾸로 잡아 [모반하여], 왕망이 끝내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 한나라의 정(鼎)을 몰래 옮겼습니다[나라를 빼앗았습니다].

광무제가 그 폐단을 통렬히 경계하여 삼공의 권한을 없애고 정권을 대각[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로 하여금 머리를 움츠리고 방관하게 하는 것은 임금이 대신을 신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권이 조정에 있으면 천하가 편안하고, 정권이 대각에 있으면 반드시 환관에게 돌아가고, 환관에게 돌아가면 조정이 혼란해집니다.
이것은 광무제가 눈앞의 잘못된 것을 경계하다가 후일의 걱정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군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다스려져 편안해지고, 소인을 등용하면 위태로워져 망합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국가의 큰 권한이니 그 쓰고 버리는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재상에게 맡기는 것은 괜찮으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니 전조에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역대 임금이 두 가지 일을 모두 재상에게 맡기니 재상이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 일을 오로지 전조에게 맡기니 전조에 권한이 편중되었습니다.
두 가지가 모두 그 마땅함을 잃었으니 후대 사람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무릇 이 여러 임금은 모두 삼대[하, 은, 주 세 왕조] 이후에 크게 공적이 있는 군주입니다.
그들이 만든 법이 어느 때는 취할 만할 것이 있으나, 끝내 두 황제와 삼왕의 정치를 이루지 못한 것은 마음을 보존하는 것으로 정치를 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데에서 오는 변통이었습니다.

맹자께서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신도 감히 여러 임금의 일을 전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聖冊)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사병(私兵)을 두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기"에 "무기, 갑옷, 투구 등 병장기를 사가(私家)에 보관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금을 위협한다는 것을 일컽는 것으로 신하에게 사병이 있으면 점차 반드시 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른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고려말에 대신과 병권을 관장하는 자가 각각 도당(徒黨)을 심어 놓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통치권을 빼앗아 마침내 나라를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우리 조선 초기에도 종실과 대신이 여전히 병권을 관장하였고, 이 때문에 부모 형제 사이가 서로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공훈이 있는 신하가 좋은 끝맺음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겪은 후에 병권을 거두어들이고 삼군부[조선 초기 군무를 통괄하던 관청]에 패기[사병에 소속한 군인들의 군적을 기록한 장부]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나라에 정벌할 일이 있으면 장수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일이 끝나면 병권은 다시 관(官)에 돌려보내고 장수는 사저에 돌아가니, 바로 옛날에 관리로서 장수를 삼고 백성으로 병사를 삼는 뜻입니다. 어찌 다시 사병을 두어 지나간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십니까?


대신을 예(禮)로 대우하는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용"에 '구경(九經; 아홉가지 떳떳한 법)으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여, 대신을 공경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진실로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로 하늘이 부여한 직위를 같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대신하는 바이니 그에게 불경할 수 있겠습니까?
고려 때 간사한 소인들이 일을 꾸며 임금을 어둡게 가리고 대신을 천시하고 욕되게 하여, 때로는 먼 땅에 쫓아내거나, 혹 사형시며 시신을 여러 사람이 보도록 거리에 널어놓았으니, 결국은 갓과 신발을 뒤바꾸어 놓은 꼴이 되었습니다.

공민왕(1352 - 1374) 때는 요망한 중 신돈이 권세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물러 하루에도 명망 있는 대신을 10여 명씩 쫓아내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령이라 속이고 유숙을 교살하기까지 하였으나, 훈구대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한(恨)을 삼켰습니다.
이후로 거의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여러 차례 커다란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니, 대신이 당한 곤란과 재앙으로 입은 불행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여러 훌륭한 임금님이 대대로 이어, 아랫사람 대접하길 공손하게 하고, 대신을 존경하여 예로써 대하였습니다.
비록 불행하게 죄에 빠지더라도 직접 죄를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써 죄를 정하게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심문하고 난 뒤에 의금부에 내려 다스리게 하되, 수갑이나 오랏줄을 풀어 주고 정실(正室)에 거처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대신이 음란하여 남녀 문제를 분별없이 하면 더럽다고 말하지 않고, "유박(유箔; 남녀가 대면할 때 그 사이에 드리우는 발)을 제대로 드리우지 못했다"고 말하며,

나약하고 능력이 부족하여 임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약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이 거느리고 있는 아랫사람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뜻이니, 어찌 미리 죄 없이 무고함을 입어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정권(政權)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는 권신(權臣)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강조가 목종(997 - 1009), 정중부가 의종(1146 - 1170)에게 한 처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그들의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바둑이나 장기처럼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로부터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여 임금은 허울 좋은 이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조일신, 김용(두 사람은 공민왕 때 권력을 잡았었음)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권한을 훔치고 농락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임견미 염홍방에 이르면 뇌물이 폭주하고 민전(民田)을 빼앗아 이들의 부(富)가 나라보다 많았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의 결재를 받게 해서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이러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조와 여러 관서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먼저 의정부의 가부(可否)를 거친 뒤 승정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승정원은 단지 출납만을 관장하나 미처 의정부에서 의논하지 못한 것은 임시로 아뢰어, 혹 승정원이 가부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한두 가지 세세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중대한 일 같으면 후에 반드시 의정부에 보고하여 알게 합니다.
이러하니 승정원의 권한이 아주 큰 것은 아닙니다.


정방(政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때에는 진양공 최충헌 부자가 4 대를 이어서 국가를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때 정방을 처음으로 만들고, 공공 관청을 개인 것처럼 여겨 젖내나는 자제를 정방의 승선으로 삼고, 당류(黨類)를 끌어들여 대각에 늘어놓게 하니, 관직을 임명한 것이 열흘만에 100여 개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정방의 이름은 어느 때는 혁파되었다가 다시 회복되었다가 하였는데, 그 말세에 이르러 먹과 책으로 정무를 처리한다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니 그 외람됨이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정방을 설치하지 않고, 문무 관직을 선발하는 일을 모두 이조와 병조에 맡긴 것은 이런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관리를 선발할 때 하는 일은 여러 관청의 공로와 잘못을 고찰하여 벼슬아치의 위계를 올리고 내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의정부의 한 사람이 관리를 선발하는 관직을 겸하여 전체를 총괄하여 이조와 병조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전조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모두 아뢰어 처리하고, 큰 일은 모두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 처리합니다. 따라서 전조의 권한이 막중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찌 정방을 다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아! 국가는 한 사람으로 주인(임금)을 삼고, 임금은 한 마음으로 주인을 삼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는 지극히 크고 한 사람은 지극히 적어, 적은 것으로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한 마음으로서 국가를 보면 국가가 비록 크지만 임금의 마음이 오히려 크므로, 큰 것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하니 천하와 국가라는 큰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크게 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본심(本心)을 보존하고 기르며, 바야흐로 싹트는 때에 마음을 살피면, 온갖 일이 지극히 번잡하더라도 하나 하나 잘 다스릴 수 있고, 백관들이 비록 많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씩 부리는 이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 것인들 임금님 마음으로 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요, 순임금이 삼가고 두려워하며, 탕왕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문왕이 공경하고 삼간 것이 모두 이 마음입니다.

아아! 이 마음을 잡으면 보존하고 버리면 없어지나니,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지 않을 수 없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 앎을 지극하게 하는 데 마음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학"에서는 이 마음으로 국가와 천하의 기틀을 삼았고, 동중서는 이 마음으로 조정 백관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이제 삼왕의 마음으로 전하의 마음을 삼으면, 이제 삼왕의 정치를 이룰 수 있고, 앞으로 네 가지 법에서도 한, 당 이후에 있었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법을 고쳐야만 지극한 정치[지치(至治)]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의 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공자께서 "이 나라에 살면서 함부로 대부를 그르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으니, 신이 대신의 계책에 대하여 어찌 감히 가볍게 의논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임금께서 하문하셨으니 신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의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학식으로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마는, 혹 망령되게 지난 일을 들은 바 있고, 혹 망령되게 오늘날 폐단을 본 바 있으니, 어찌 한두 가지 아뢸 수 있는 것이 없겠습니까?
짧은 시간이라 마음에 품은 바를 다하지 못하고 대략 대답하여 황공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전하께서 재량하옵소서.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


***


신숙주의 답안
1447 년 세종 29 중시에 을과급제
[갑과는 3 사람이고, 앞의 성삼문은 이 갑과 중의 1 등이었다. 을과는 7 사람으로 신숙주는 을과의 몇 번째였는지는 모르겠다. 필원잡기를 쓴 서거정은 을과의 1 등이었다. 병과는 28 - 33 인을 뽑았다.]
대책[답] :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지영수성(持盈守成; 가득 찬 것을 유지하고 이룬 것을 지킴 - 창업한 것을 이어 받아 지키는 것)하시어 정사(政事)에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는 데 뜻을 두시고, 널리 뛰어난 인물을 구하려고 궁전 뜰에서 책문을 내시어 역대의 득실 자취를 헤아린 뒤 오늘의 폐단을 없애는 방법을 듣고자 하시니, 신이 비록 우매하나 생각을 말씀드려서 임금님 책문에 만 분의 일이나마 답할까 합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창업하는 것과 수성하는 것은 형세가 다른 것으로,

창업하는 정사는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손익(損益)을 헤아리고 폐단을 없애 그치게 하며,

수성하는 정사는 옛 법을 따르고 삼가 지켜 폐단을 없애서 그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한(漢)나라가 일어났을 때, 진(秦)나라의 형법이 가혹하여 예악(禮樂)이 사라졌으므로, 가의와 동중서는 이를 탄식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고치는 것을 일삼았으며, 후대 사람은 이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는 제왕의 다스림은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망령되게 고쳐서 임금을 현혹시키는 것이 어찌 수성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후한(後漢)에서는 무사 선발시험 날에 군사를 일으킨 폐단으로 인하여 지방의 도위(都尉; 군사 담당관)를 줄여 전차와 기병을 관장하는 벼슬을 혁파하였으며, 송 태조는 당나라 말기에 번진[절도사]이 강했던 것을 보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이 직접 관리하였다.
그러나 후한은 병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외방이 약한 실수가 있었고, 송나라는 적국과 전혀 다투지 못할 정도로 전력이 허약한 걱정이 있었다.

한 문제(BC 180 - 157)는 가의의 말을 받아들여 대신을 예우(禮遇)하고 형벌을 가하지 않게 하였는데, 그 말류(末流)의 폐단으로 대신이 모함을 당해도 스스로 하소연할 수 없었다.
당 태종(626 - 649)은 신하를 염치로 대하여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니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이야기할 수 있었는 데, 도리어 귀한 신하는 불려오지 않아 잃는 것이 많았다.
광무제(25 - 57)는 전한에서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은 것을 거울 삼아, 삼공에게 아무 실권 없이 자리나 지키게 하고 정권을 대각[상서성, 그 당시의 비서실]에 돌아가게 하였다.

예로부터 인재를 살피고 헤아려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은 어려웠다. 한, 당 이후 어느 때는 재상이 주관하거나 또는 전조[이조와 병조]가 주관하였으나, 그 득실에 대해서는 후대 사람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위에 말한 네 가지는 모두 다스림의 도(道)와 관련이 있는데, 그 자세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군사력은 중앙이 약하면 외방이 강하고, 외방이 약하면 중앙이 강하니, 이것이 고금의 일반적인 근심거리다."라고 합니다.

군사력이, 중앙이 약하고 외방이 강한 시대는 전한(前漢), 당과 오대 말엽이고, 외방이 약하고 중앙이 강한 시대는 후한과 조송[임주(任註); 조광윤의 송, 당송 팔대가라고 할 때의 송나라]입니다.
전한은 외방에 도위,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두어 울타리로 삼았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동군의 태수인 적의가 무사 선발시험에서 전차와 기병을 훈련시켜 군현에 격문을 돌렸으며, 이통은 광무제에게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는데 또한 무사 선발시험하는 날이었습니다.
대오(隊伍)의 선두에 서 있는 대부와 아랫벼슬아치를 위협하여 그것으로 대중을 호령하고자 하였습니다.

광무제가 중흥하자, 그 폐단을 익히 알아 재위 6 년에 군국의 도위를 없애고, 7 년에 전차와 기병의 재관을 혁파하고, 9 년에 관중의 도위를 없앴으니 외방의 병력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지자 외방 번진의 구원이 없고, 힘센 신하들이 거리낌없이 정치를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 후 비록 자사(刺史)를 고쳐 주목(州牧)을 두었으나, 한나라는 결국 셋으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너무 심하게 고쳤기 때문에 또 다른 폐단이 생긴 것입니다.


당과 오대 말엽에 외방 병력이 강한 폐단이 극에 달해, 번진이 제멋대로 날뛰어 넷으로 나뉘고 다섯으로 쪼개져 끝내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송 태조는 군대에서 지냈으므로 그 폐단을 잘 알았습니다. 즉위하자 조보의 계책을 받아들여 술 마시는 자리에서 부드럽게 장수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왕심기 등의 병권을 빼앗아 수백 년 간 이어온 번진의 폐단을 제거하고 병사 하나, 재물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정에서 관리하였으니, 외방의 병권이 강한 폐단을 혁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쇠약해져 구적[여진족]이 침범하매 강한 울타리의 보호가 없으므로, 군현이 뿔뿔이 흩어져 맥을 못 추었습니다.
금(金)나라 사람이, 무인지경을 달려온 것처럼, 남쪽으로 내려온 지 며칠만에 도성 아래에 이르렀고, 순식간에 두 황제가 북으로 잡혀갔으며, 도망가 숨을 겨를도 없어 겨우 강동(江東)만 보존하고 마침내 떨쳐 일어나질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왕망(8 - 23)이 찬탈하여 법령을 까다롭게 만들어 손만 까닥 흔들어도 금령에 저촉되니 모두 일어나 도적이 되었고, 더구나 사람들은 다시 한나라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것이 오로지 외방의 병력이 강한 죄뿐이겠습니까? 휘종(1101 - 1125)과 흠종(1126) 때 채경이 재상이 되어 새파란 애송이를 줄줄이 장수로 세워 방자하게 강한 적을 건드리고도 오히려 스스로 돌이킬 줄을 몰랐으니, 설령 병력이 약하지 않았더라도 어찌 쇠미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또 임금은 대신을 예로 높여 공경히 존중해야 하니 어찌 일반 서민들처럼 경, 의, 곤(머리 깎는 형벌), 태(笞; 볼기 칠 태)를 내리겠습니까?

이 때문에 가의가 대신을 예에 합당하게 공경할 것을 정성껏 아뢰었고, 한 문제는 대신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 태종이 죄수를 불러들여 심리한 적이 있는데, 기주자사 정선과에 미치자 태종이 말하길, "선과는 관품이 낮지 않은데, 어찌 다른 죄수들과 같은 대오 속에 있을 수 있는가?"하고 묻고는 마침내 삼품 이상은 다른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았습니다.
호인이 이를 논하여 말하길, "신하를 염치의 도로 대우하는 것은 얻었으나, 다른 죄수들은 불려와 정황을 하소연할 수 있는데, 귀하고 가까운 신하들은 도리어 불려오지 않아 죄 없이 모함을 당하고 원통하게 누명을 써도, 스스로 진달할 길이 없으니 그 폐단 또한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소망지, 양운, 유계, 장량의 일은 모두 사람들 마음을 찜찜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대신에게 원통함이 있어도 고할 기회를 없게 하여 존중한다는 것이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되었으니, 이 어찌 대신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뜻입니까?

신은 가의가 대신에게 형벌을 가하지 말도록 아뢴 것은 옳다고 생각하나 자살하는 단서를 열게 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태종이 대신을 일반 죄수들과 같이 불러들이지 않게 한 것은 옳으나 어찌 따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입니까?

서산 진씨는 말하기를 "대신이 죄가 있으면 자살을 하게 하여 참으로 오랏줄로 묶이고 매질을 당하는 치욕을 면하게 했으나, 그 폐단은 대신이 죄 없이 모함을 당해도 감히 스스로 하소연하지 못하고 아무 변명도 못하고 죽게 한 것이니, 삼대에는 분명 이와 같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권은 임금의 큰 권한이니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한 말에 태아[칼 이름]를 거꾸로 잡고 힘센 신하들이 권력을 주물러서 왕망에 이르러서는 작은 국량과 하찮은 재능으로도 힘들이지 않고 한나라의 정(鼎)을 옮겼습니다.
그 후 광무제가 중흥하자 여러 세대 동안 정권을 잃었던 것에 분개하고 깊이 생각하여 원대한 계책을 세워 여러 장수를 모두 후(侯)로 봉하되 일은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삼공(三公)의 권한을 제한하고 모든 권한을 총괄하였으니, 스스로 전대(前代)의 폐단을 모두 없앴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대신에게 믿음으로 맡기는 것이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어찌 삼공으로 하여금 자리만 갖추게 하고 도리어 대각에게 임금의 권한을 잡게 할 수 있습니까?

환관의 권세가 성하여 당고의 화(禍)[후한 환제 때 환관들의 정치 농단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신하들이 벌을 받은 것]가 일어났으나, 삼공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관만 하였고, 감히 누구라도 어떻게 조치하지 못하는 번왕(藩王)과 여러 장수들로 인하여 한나라가 결국 망하였습니다.
선유(先儒; 과거의 유학자)가 이에 대해 논하기를, "굽은 것을 고치려다 바른 것을 지나쳤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올바른 지적입니다.

사람을 쓰는 것은 나라의 큰 권한이니, 인재를 뽑는 권한을 맡기는 것은 살피셔야 합니다.

재상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자격과 이력을 따져 서열을 매기는 것은 재상을 번거롭게 하므로 적절하지 못합니다.
서열을 매기는 것은 전조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되, 인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것까지 모두 전조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한, 당에서 역대로 어느 때는 재상에게 맡겼다가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려도 그 번거로움을 감당하지 못했고, 어느 때는 전조에 맡겼다가 권세가 편중되어 체통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후대 사람의 논박을 면하지 못합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 우리 조선에서는 고려의 사병(私兵)을 경계하여 모두 혁파하였다. 그런데 그 후에 한 대신이 다시 사병의 이로움을 말했다.
고려에서 대신을 욕보인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비록 죄과(罪過)가 있다 해도 죄를 직접 캐묻지 않고 여러 가지 증거로 죄를 정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죄 없이 모함에 빠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대신이 정권을 쥐고 흔든 것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임금에게 재결받도록 하여 의정부가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신이 또 말하기를 '승정원이 가진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였다.
고려에서 정방이 외람되게 인사권을 행사한 폐단을 거울 삼아, 우리 조선에서는 이조와 병조가 분담하게 하였는데, 그 권한이 또한 크니 정방을 다시 설치하고 제조(提調; 큰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임명되어 그 관아를 다스리는 경우의 종 1 품, 또는 2 품인 경우. 정 1 품이면 도제조.)를 임시로 낙점하도록 하자는 대신이 있다.
거론된 대신들의 네 가지 책(策)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아니면 또 다른 의견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들으니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비괘가 극에 달하면 태(泰)괘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고려말부터 나라가 어지럽고 정치가 어두워졌는데, 우리 태조(1392 - 1398)께서 하늘에서 내려 준 성인의 덕을 갖춤으로써 운수에 부응하여 나라를 열었습니다.
뒤이어 여러 훌륭한 임금들이 옛날을 헤아리고 오늘을 살피어, 나쁜 법을 모두 혁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폐단이 없는 법이란 없으므로, 진실로 성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을 만들면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하나하나 진술해 보겠습니다.


사병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권신들이 제멋대로 날뛴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사병의 설치는 처음에 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고자 한 것인데, 그 폐단으로 임금이 약해지고 신하가 강해져 갓과 신발을 바꾸어 놓은 꼴이 되어 사병을 혁파해야만 했습니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 지속되니 군사의 방비가 해이해지고, 장수가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가 장수를 알지 못하면, 갑자기 군사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사병을 설치하자는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죄가 있어도 직접 대놓고 캐묻지 않은 것은, 고려에서 대신을 낮추고 욕보인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고려에서는 대신에게 사정없이 볼기를 치고, 죄인을 죽이는 데 쓰는 도끼와 쇠모탕으로 죽이니, 이 어찌 예로써 높이고 공경히 존중하는 뜻입니까?
이 때문에 대신을 욕보이는 것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심나는 옥사는 밝히기 여려운데다 간사함이 날로 늘어나, 여러 증거로 죄를 결정해도 반드시 애매 모호하여 원통하게 죄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죄 없이 모함을 받는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는 것을 혁파한 것은 고려의 대신이 외람되이 권력을 남용한 폐단을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는 크고 작은 일을 의정부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임금께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했는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가 권력을 잡게 되어 권한이 승정원[왕명의 출납을 맡은 기관]에 돌아가니, 이 때문에 승정원의 권한이 지나치게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정방을 혁파한 것은 고려에서 인사권을 외람되게 행사한 폐단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조선에서 이조와 병조가 그 권한을 나누어 관장하여 인물을 등용하거나 내치도록 하였는데, 화복(禍福)을 제멋대로 주물러 권세가 너무 크니, 이 때문에 그 권세가 너무 크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고려의 잘못된 것을 거울 삼아 새로 개혁한 네 가지는 폐단이 없을 것 같은 데도 폐단이 생겼고, 개혁한 네 가지에 대한 대신의 이견(異見)은 온당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온당치 못합니다.
신이 가만히 네 가지 폐단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니, 반드시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네 가지 폐단을 없애는 방법은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대체로 법에 폐단이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성육률[음악을 말한다]에 음탕한 음악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선왕은 대략적인 것만 남겨 두고 사람에게 맡기어, 진실로 백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억지로 없애지 않았으니, 전부를 변경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사병을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후한의 광무제와 송 태조가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한 뜻을 본받되, 항상 슬기롭게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해이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대신을 낮추고 욕보이는 폐단을 혁파하는 것은 당 태종과 가의가 대신을 존중한 뜯을 본받되, 항상 의심나는 옥사가 있을 때는 그 애매 모호한 것을 신중하게 살펴 간사함이 날로 불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사를 제멋대로 결정하는 폐단을 혁파하려면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의정부를 거치게 하고, 승정원은 삼가고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광무제가 삼공은 자리만 지키고 정권은 대각에 돌아가도록 한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정방의 폐단을 혁파하려면 이조와 병조가 인사권을 주관하고, 의정부 역시 관리를 등용하거나 내치는 권한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다만 오늘날의 제도에 견주어서 믿음으로 맡기어 후대 사람의 비판을 면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져도, 그 근본은 반드시 사람을 임용하는 데 있습니다.

적임자가 있는데 쓰지 않거나, 쓰되 그 말을 행하지 않거나, 그 말을 행하되 그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그 법을 백 번 바꾼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신은 네 가지 폐단을 구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엎드려 성책을 읽어보니,
"그대 대부들은 사책에 널리 통달하니 현실에 맞는 대책을 깊이 밝혀, 각자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루하니, 이 짧은 시간에 품은 생각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향리에서 추천하는 법을 폐지한 이후에 과거 제도가 생겼다고 합니다.

한 무제가 처음 천하에 조서를 내려 어질고 바르며 곧은 말로 간쟁하는 선비를 추천하라고 하니, 동중서의 무리가 충직한 말과 곧은 의논으로 책문에 답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 옵니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책문을 내어 선비에게 물어 마음껏 토로하는 언로(言路)를 연 것은, 그 당시 정치의 폐단을 듣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얻고자 한 것이니, 이는 다만 과거 응시자를 시험할 뿐이 아닙니다.
선비를 뽑는 데 대책(對策)으로 하는 것이 역시 좋은 법입니다.

후세에 이르러, 임금은 겉치레로 옛일을 본떠 책문을 내고, 아랫 사람의 대책은 다만 문장이나 멋들어지게 만들어, 문장의 교묘함과 졸렬함을 비교하여 자신을 파는 매개로 삼으니, 이는 윗사람으로 인하여 빚어진 결과입니다.

당 문종(827 - 840)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에서 친히 책문을 내고 유분이 허심탄회하게 답하니, 시험관 풍숙이 탄복했으나 감히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희녕 연간(1068 - 1077)에 왕안석이 정권을 잡았는데, 공문중이 대책에서 신법(新法; 왕안석이 마련한 법)을 문제삼자 마침내 천자가 문제를 내는 임시과거를 폐지했으니, 그 말의 곧음을 미워한 것입니다.

말하게 하고 나서 절실한 것을 두려워하고 곧은 것을 미워한다면 어찌 허심탄회한 언로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비들이 날로 너도나도 교묘하게 속이는 데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상 전하께서 친히 문제를 내어 선비들에게 물으시니, 이는 언로를 열고 오늘의 폐단을 물으셔서 이른바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을 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유분처럼 극언(極言)을 하고, 공문중처럼 신법을 논해도 당연히 받아들이려 하실 것이니 신이 감히 숨기는 바가 있겠습니까?


오늘의 폐단 중에 이 네 가지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강이 떨치지 못하고, 조정은 날로 허물어지고, 민생은 어렵고, 하늘의 변고가 여러 차례 보이고, 풍속이 야박해지고, 탐욕스럽게 마음껏 거두고, 절의를 닦지 않고, 억울한 옥사가 넘치고, 도적이 횡횡하는 것입니다.

신은 토붕지환(土崩之患; 흙이 무너지듯 조직이나 사물이 근본적으로 무너져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 한(漢)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앞서 말한 네 가지 폐단을 구하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언로를 널리 여시어 직언(直言)을 받아들이고, 날마다 대신과 더불어 그것을 구제할 방도를 강구하여 행하시면, 사계절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견고해서 누적된 폐단을 구제하기 어려울까 근심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니, 나라와 온 백성에게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

출처 : http://whs.inha.ac.kr/~ssyim/book/book42.htm
원문에서 주석부분을 제외했습니다.

***

성산문과 신숙주의 답변을 보니 각자 중하게 여기는 것과 업무스타일을 대략이나마 알 수 있는것 같습니다.

과거시험이 현실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그것의 해답을 응시생 각자의 입장에서 제시하는 방식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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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한대승(불의회상) / 2015/10/12 10:44:42 / 추천 0
스크롤의 압박이.....
변종원(웅파) / 2015/10/12 14:22:05 / 추천 0
아이폰에서 보다가 포기했어요. 눈 아파서.. ㅠㅠ
건곤대나이 / 2015/10/12 14:45:27 / 추천 0
요약할 재주가 없어 원문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ㅜㅜ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일단을 볼 수 있는 글이라
상식차원에서 시간내어 읽어 보시면 얻는바가 있을듯하여 올려보았습니다.

그리고 임금과 신하간에 예의는 지키면서 신하가 임금에게 비록 시험의 형태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하는것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세종이 그당시 장원을 준 인물이 사육신중의 한분인 성산문이고
생육신중의 한분인 신숙주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하지 않은것도 눈여겨 볼 부분인듯 합니다.
그당시 세종이 어떤 정치를 했는지도 옆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성삼문과 신숙주는 뜻을 같이한 동지에서 단종 폐위 사건(세조반정)때 서로 갈라지죠.

저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신숙주 가문에 우리가 잘아는 화가 신윤복,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있다고 위키백과에서는 알려주더군요.

성삼문은 의를 지키며 죽었고
신숙주는 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만약 제가 두분의 입장에 놓인 한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그런 상황이 오면 그런 선명한 선택이라도 할 수 있을지 

선조들의 삶을 통해 한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것도 필요한것 같습니다.

글이 길어 죄송합니다. ㅜㅜ


 
한대승(불의회상) / 2015/10/12 15:35:24 / 추천 0
@건곤대나이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꼼꼼히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과거 시험 하면 떠오르는게 춘향전 이도령정도 였는데, 질문 내용과 답변이 심오 하더군요.
역시 좋은 답변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